[스크랩] 이슬아 초단, 사랑에 빠지다.

이슬아 초단, 사랑에 빠지다.
글쓴이 라마승      조회 1250   평점 980   2010-07-11 오후 11:52

네이버 블로그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슬아 초단이 쓴 수필을 발견했어요.

한 블로거가 이슬아 초단의 싸이 미니 홈피에 적힌 글을 옮겨온 것이더군요.

읽고서 감동했어요. 문학적 감성이 이렇게 풍부할 수가...

어떤 분 댓글을 보니 이슬아 초단이 싸이를 탈퇴했다고 하더라구요.

미니 홈피가 사라져 버린 거죠.

그와 함께 거기 적힌 글들도 다 사라져버린 셈이죠.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뻔한 이슬아 초단의 수필,,

혼자 읽기 아까워서 오로광장에 소개합니다.

 

 

 

 

 

 

 

 

 

 

 

 

 

 

 

 

 

오늘 나는 강남역에서 1분만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버스를 타려다 지하철로 돌아왔다.

만일 내가 곧 바로 지하철을 탔다면 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그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은

3만 피트 상공의 하늘에서 운명의 줄을 잡아당긴 것이었다.

 

짧은 헤어 스타일의 그는 연갈색 자켓에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하얀 옆 모습은 하정우를 닮았다.

조금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내게 입맞춤을 쉽게 허락하지도 (그러면 나는 배은망덕해질 것이다.)

절대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지도 (그러면 나는 곧 그를 잊어버릴 것이다.) 않고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내 마음에 안겨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너무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또 약간 부족한 듯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에게 달려가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내 침묵이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이 흐르면 그것은 상대가 별로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멋진 그와의 침묵은 내 자신이 별로인 여자가 된다.

 

난 나의 상비군 패션의 현실이 줄 없이 번지 점프하고 싶게 만들었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나는 그가 언젠가는 내려버릴 것을 염려하며

나의 마르크스 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하며

나는 잠시 동안 중요한 위험을 망각했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 줄 경우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바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타락한 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그가 어떻게 내가 바라는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나는 내게 묻는다.

 

그가 정말로 늘 그렇게 멋진 모습이라면 어떻게 상비군 패션에, 살 따윈 신경도 안 쓰고 닭발을 먹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나만 그를 사랑하는,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안전하게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 이외에는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는, 내 스스로 겪는 달콤 씁쓸한 사적인 고통이니까.

 

어쩌면 나는 아름답고 고귀한 그와의 사랑으로 동맹을 맺음으로써 부족한 외모, 몸매 등 나의 약점을 외면해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 만한 증거라고 나는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그와 마시멜로 같은 달콤함이 있었으면 하고.

 

그의 코는 약간 스탕달적인 매부리코였는데, 매력과 삐뚤어짐 사이에서 나를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실리콘이 튀어나올 듯 성형이 난무하는 요즘, 그만의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수학적 비율을 비켜가며 세밀한 곳들에서 매력을 발산했다.

고전적으로 멋진 그동안의 오빠들은 내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었다.

 

강남에서, 그가 내리는 건대 입구까지 열 정거장. 그리고 24분.

그의 옆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가 내 허리를 감는 오빠였으면 하고, 바둑이 끝나면 뜨거운 커피 한 잔 들고 날 반겨주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나와 한스 갤러리에서 달콤한 티라미슈를 먹는 단 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미리가 나보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그랬다.

난 차갑지 않다. 내 마음 안에도 따뜻한 사랑이 숨 쉬는 데, 단지 그를 오늘에서야 만났을 뿐이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리니?

 

그는 내릴 때 큰 키 때문에 머리를 숙였다.

마지막 뒷 모습까지 멋진 그가 그렇게 내리고 문이 닫혔다.

이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늘 자살을 시도했다.

롤 케익을 꾸역꾸역 먹으며 뱃속이 꽉 차 터져버리길 바랐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개워내며 나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사랑은 커피나 담배처럼 완전히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포도주 한 잔이나 초콜릿처럼 가끔은 허용되는 것일까.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은 계속 미친 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다.

지나친 의욕, 고통, 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 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돈에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내 야심은 당찬 것일까?

 

나는 내일 91모임을 하고 유택이가 손구락으로 안경을 올리며 웃는 미소를 보며 다시 살아갈 것이다.

다시 바둑을 두고, 왕십리의 지겨운 골목 구석구석을 돌다니며..

그리고 나는 언젠가 다시 사랑을 하겠지...

 

2010년 1월 2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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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숭이 | 2010/11/24 04:27 | 기타 | 트랙백(11519) | 덧글(1)

엄마, 우리 함께 있어요.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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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6&articleId=31861

by 뽀숭이 | 2010/11/24 00:19 | 자료 | 트랙백 | 덧글(0)

[스크랩] [ESSAY] 죽음과 마주하는 법

 김스텔라 서울 모현가정호스피스 수녀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 손과 발을 어른들은 얼굴과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아직 먼 것처럼 느끼지만…

그 할머니를 만난 것은, 통증이 너무 심하자 할머니의 아들이 다급한 마음에 가정호스피스를 찾아 우리에게 연락했기 때문이다. 통상 서너달 진단을 받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간호를 하는 게 가정호스피스 역할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하얀 천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도 동여매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는 왜 그러고 계셔요?”


“머리를 꽁꽁 묶어 놓으면 머리가 안 아프거든.”


할머니는 암 말기로 더 이상 병원에서 해 줄 게 없다고 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가서 치렁치렁 고무호스와 줄을 매달고 있느니 집에서 조용히 임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어 아프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진통제를 드리자 통증은 조절되기 시작했고, 구역질과 구토 문제도 해결돼 식사도 제대로 하게 됐다. 그렇다고 죽음의 두려움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집안에 혼자 계셔야 할 때가 많아 오히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루는 밤늦게 통증이 심하다고 해 집으로 방문하자, 할머니는 “사람도 아녀”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가 살아나더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다”고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할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우리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는 아프고 힘들 때 누군가가 늘 함께 있어 주기를 원했던 거였다. 신체적인 통증만 아니라 정신적 통증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늦은 시간에도 집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는 편안해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렇게 4개월여를 보낸 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들도 모여 있었다. “지금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 손자들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의 권유에 아이들이 한명씩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젠 아프지 마세요.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사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말할 힘조차 없는 할머니는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얼굴은 금세 평안해졌고 가족들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할머니에게 새 옷을 입히기 위해선 목욕을 시켜드리시죠”고 하자,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의 손과 발을 씻겼고, 어른들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여윈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과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할머니는 비록 한마디도 못하고 숨 쉴 힘조차 없는 상황이 됐지만 얼굴 표정으로, 눈 한번 맞추는 것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할머니와 지낸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장례식과 유언에 대해 말했다. 자기의 유언대로 가족들이 해 줄지 염려하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런 얘기를 하면 환자들은 되레 차분해지면서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는 그날 자신의 소원대로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어둠을 잘 헤치시고 빛을 향해 웃으며 가시지 않았을까.

나는 이 가정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아가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임종해 죽음을 접할 기회가 적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임종을 지키게 할 것이냐를 놓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정들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녀들이 받게 될 상실감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방암 말기인 38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친척들은 “아이들에게 아픈 엄마의 나쁜 기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엄마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제일 큰 녀석이 엄마에게 “이젠 아프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 품에 한참 동안 안겼고, 자기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엄마도 그렇게 아이를 안았다. 둘째도 엄마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고 6살짜리 막내가 “엄마 잘 가”라며 아픈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소리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린 자녀 셋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며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가족과 인사를 한 아이 엄마는 그날 밤 숨을 거뒀다.


장례를 치른 뒤 아이들의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엄마의 죽음을 못 봤다면 아마 엄마 이야기는 우리 집에선 말도 꺼내지 못했을 거예요. 온 가족들이 모두 그런 어려움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엄마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나보고도 오히려 힘내라고 하니….”


어른들의 염려와 다르게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통해 죽음이 아주 캄캄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겐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마치 나에게는 아직도 먼 것처럼 느끼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태아가 열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마치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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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항상 가까이 하는직업을 가진 저로서 항상 부끄럽게 느끼게 하는 글들입니다. 그저 눈물만 납니다.[2010.08.05 00: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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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글 읽다 갑니다.. 새삼 많은걸 생각하게 되네요[2010.08.04 23:4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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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살아계실때 효도하십시오. 돌아 가신 뒤에 후회를 하면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효도하십시오.[2010.08.04 23: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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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은 한조각 구름의 일어남이요. 死란 뜬 구름의 쓰러짐이라. 구름본래 실체가 없는 법, 나고죽음 또한 이러는 것일레, 한물건 잇어 항상 또렷하니 이건고요해서 生死에 따르지 않네.....[2010.08.04 23: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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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참으로 평안하게 해주는 기사군요..그러나 잠시뿐..또 다시 돈 벌려고 사기치고 죽이고 모함하고 뒤통수치는 세상으로 갑니다. 돈이 거기 있기에...[2010.08.04 23:20:17]

by 뽀숭이 | 2010/08/05 00:34 | 비공개_공부 | 트랙백(16) | 덧글(0)

[스크랩] 그가 불렀던 청춘 비가, 영화감독 곽지균, 1954~2010

한국을 대표하는 멜로드라마의 장인이었던 곽지균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들기 힘든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 아프다. 20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곽지균 감독. 그의 영화 인생을 뒤돌아본다.


[한국영화 감독론 3] [키노 감독사전] [한국영화 감독사전] 등을 참조했습니다.


글 l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그가 불렀던 청춘 비가, 영화감독 곽지균, 1954~2010
영화를 사랑했던 내성적인 소년

젊은 시절(1986년)의 곽지균 감독(왼쪽 사진). 조문진 감독의 [고가](오른쪽 사진)의 스크립터로, 그는 충무로 생활을 시작한다.
1954년 11월 10일 대전에서 태어난 곽지균(본명 곽정균) 감독의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4남 1녀 중 막내였고,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것 정도? 단 하나 취미가 있었다면 영화, 특히 한국영화를 보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그는 영화 만드는 건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했고, 사교성 없는 조용한 소년은 극장의 어둠 속에서 영화라는 친구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는 당시 영화 보기를 통해 다른 세계를 접했다. 스크린을 통해 접한 다양한 풍경과 세계는 그의 내면 세계를 형성했고, 그의 감수성을 형성했다. 결국 그는 영화를 선택하게 되는데, 결정적 계기는 고등학생 시절에 찾아왔다. 당시 이유 없이 몸에 열이 나는 병을 앓았던 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일상 생활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후유증은 오래 갔다. 그런 와중에, 곽지균 감독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힘겹게 떠올린 단어가 바로 '영화'였다. 

곽지균 감독은 서울예전 영화과로 편입한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이렇게 말한다. "20세 전후 무렵, 남들처럼 평범하게 얹혀 지내던 일상의 맥이 툭 끊어지고 돌연한 변화들이 닥쳐왔다. 바로 그때 의식의 저 밑바닥에 잠재해 있던 미학들이 낯선 이방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성큼 내 것으로 다가왔다." 

곽지균 감독은 졸업 후 1977년부터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시작한다. 첫 현장은 조문진 감독의 [고가](1977). 당시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데, 아버지는 몸이 약한 아들이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8년 동안 총 18편의 영화에서 연출부 생활을 한다. 통솔력과 원만한 대인 관계를 필요로 하는 현장 탓에 내성적이었던 성격도 조금은 바뀌었다.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시절은 곽지균 감독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왼쪽 사진은 [만다라].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오른쪽 사진)은 곽지균 감독이 조감독으로서 참여한 마지막 작품이다.
조문진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78)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1978) 연출부를 거친 후 만난,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생활은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4년 동안 [가깝고도 먼 길](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신궁](1979) [내일 또 내일](1979) [짝코](1980) [복부인](1980) [만다라](1981) [우상의 눈물](1982) 등의 작업에 참여했는데, 곽지균 감독은 임권택 감독과의 작업을 "연출 수업뿐만 아니라, 인간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한 연출자가 어떻게 풀어나가는가를 관찰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말한다. 

노세한 감독과의 작업은 그가 시나리오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탄야](1982)의 각색으로 시작해, [장대를 잡은 여자](1984) [사슴 사냥](1985) 등의 영화에 그는 연출부 겸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다. 그리고 거의 동년배인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이 되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깊고 푸른 밤](1984)를 마친 후 데뷔를 준비했다. 첫 영화는 최인호 원작의 [겨울 나그네](1986). 1986년 4월 12일에 개봉된 이 영화는 서울 관객 40만 명을 넘긴,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전국 500만 명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198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개봉 전 어느 인터뷰 한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영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곽지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 구도와 같은 것. 삶에서 느끼는 고통과 부조리, 희열 등을 진실한 감동의 차원으로 포착하는 것." 그리고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라는 질문엔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정교하게 해부하는 작품. 가능하면 인간적인 구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겨울 나그네], 곽지균의 청춘 비가

순수한 사랑과 현실적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민우. 그가 겪는 고뇌와 갈등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당시 최인호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흥행을 보장받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나, 곽지균 감독이 데뷔작으로 처음부터 [겨울 나그네]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가 더 적극적이었다. [깊고 푸른 밤]를 인연으로 알게 된 곽지균 감독에게 최인호 작가는 자신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연출해보라고 했던 것. 곽지균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기엔 원작이 너무 감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인호 작가는 곽지균 감독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한 그 어떤 감수성을 보았다. 이후 곽지균 감독은 데뷔작에 대해 "영화 공부를 할 때는 영화미학이 풍부한 작품을, 조감독 시절엔 존재론에 대한 접근을 하고 싶었다"며, "[겨울 나그네]를 하고 난 후, 감성과 서정성이 내게 잘 맞음을 깨달았다. 최인호 작가가 이 잠재력을 찾아주었다"고 말한다. 

[겨울 나그네]는 당시 진정 새로운 영화였다. 한국영화가 한창 에로티시즘으로 치닫고 있던 시절, 이 영화의 섬세한 감성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울렸다. 긴 조감독 시절에 쌓은 내공은 섬세한 연출로 드러났으며, 당대의 A급 스타였던 안성기와 이미숙, 한참 각광받던 떠오르는 신예인 강석우와 이혜영이 빚어내는 앙상블도 뛰어났다. 곽지균 감독은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충무로는 재능 있는 신인 감독 한 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겨울 나그네]는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당시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이었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특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인데,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그때는 젊은이들에겐 잔인한 시기였다. 그들에겐 도피처가 필요했고, 자신들의 좌절을 위로해줄 손길이 필요했다. 이때 [겨울 나그네]가 등장했고, 이 영화가 지닌 '낭만적 비극'의 톤은 크게 어필했다. 

민우가 자전거를 타고 교정을 달리는 [겨울 나그네]의 오프닝(왼쪽 사진)과, 자효(김래원)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청춘]의 한 장면(오른쪽 사진). 이 두 장면은 곽지균 감독의 '나만의 장면'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의 그리움이며 그걸 통해 지금의 나를 뒤돌아볼 수 있기" 때문.
주인공인 대학생 민우(강석우)는 우연히 다혜(이미숙)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괴짜인 현태(안성기)는 민우의 든든한 선배. 하지만 민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양공주였다는 걸 알게 되고, 기지촌에서 일하는 은영(이혜영)이라는 여자를 만나 충동적인 사랑에 빠진다. 한 차례 사건을 겪고 감옥 생활을 하게 되는 민우. 출감 후 그는 은영이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다혜와 현태는 결혼한다. 범죄 세계의 일원이 된 민우. 그는 허망한 눈빛으로 죽음의 돌진을 한다. 

곽지균 감독은 [겨울 나그네]가 "우리가 죽이고 있는 순수에 대한 이야기"라며, "파멸해가는 순수를 에워싸고 우리의 분신들이 벌이는 사랑과 그 양면성에 대한 해부도"라고 말한다. 이 영화엔 이후 곽지균 감독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들이 들어 있는데, 청주대학교 김수남 교수는 그것을 "죽음과 절망, 상처받은 자의 아픔, 허무주의"로 요약하며, 여기엔 "새로운 희망"도 제시됨을 지적한다. 

그리고 [겨울 나그네]엔 곽지균 감독의 두 가지 강점이 드러난다. 먼저 '음악'이다. 곽지균 감독은 당시 충무로에서 영화음악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감독이었고, 이것은 그의 멜로를 더욱 촉촉하고 감각적으로 만들었다. [겨울 나그네]에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에게 편곡과 연주를 부탁했다. 두 번째 작품이었던 [두 여자의 집](1987)에 흘렀던 김수철의 영화음악은 당시로선 파격적이며 신선했다. [상처](1989)에선 당시 최고의 대중음악가였던 이범희에게 음악을 맡겼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녹음했다. [젊은 날의 초상](1991)에 흘렀던 김영동의 영화음악도 당대의 인상적인 사운드였다. 

[겨울 나그네]의 강석우(왼쪽 사진)와, [젊은 날의 초상]의 정보석과 배종옥. 그들은 곽지균 감독의 영화를 통해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그리고 곽지균 감독은 '배우의 감독'이었다. 수많은 배우들이 그의 영화를 통해 충무로에서 탄탄한 발판을 마련했다. [겨울 나그네]의 강석우와 이혜영(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비롯, 정보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과 [젊은 날의 초상]으로 영화배우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배종옥은 [젊은 날의 초상]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떠올랐다. 김래원은 [청춘](2000)으로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특히 곽지균 감독의 섬세한 연출은 여배우들에게 어필했고, 이것은 멜로드라마 감독으로선 매우 큰 강점이었다. [겨울 나그네]와 [두 여자의 집]에 출연했던 이미숙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곽지균 감독님은 여성적이고 섬세하시죠. 저처럼 느낌으로 연기하는 사람은 곽 감독님의 계산적인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날 수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이미숙'이라는 배우에 대해 파악하시고 약간은 여유 있게 연기 지도를 하셨어요." 곽지균 감독은 자신의 틀에 배우를 맞추기보다는 배우의 개성을 고려해 전반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당시 충무로에선 보기 드문 연출 스타일의 감독이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두 번째 영화 [두 여자의 집](왼쪽 사진)과 세 번째 영화 [상처](오른쪽 사진). 곽지균 감독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점점 깊어졌다.
곽지균 감독은 데뷔 때부터 충무로에서 '행운아'라는 평가를 받았다. 줄곧 A급 스타를 캐스팅할 수 있었고, 태흥영화사나 동아수출공사 같은 이름 있는 제작사와 작업했으며, 2억 원이 넘는 제작비는 꽤 큰 규모였다. 하지만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은, 이것은 20편에 가까운 조감독 생활을 통해 쌓은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매우 꼼꼼하게 촬영을 준비했고, 시나리오 작업도 최대한 만전을 기했으며, 제작 일정이나 제작비 관리도 철저했다. 

곽지균 감독은 두 번째 작품으로 [두 여자의 집]을 선택한다. 자매인 유화(한혜숙)와 유경(이미숙), 그리고 유연히 동거하게 된 남자 민준(강석우)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 영화는 전작과는 사뭇 다른 톤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곽지균 감독에 대해 오해해선 안 될 부분은, 그가 '멜로를 위한 멜로 감독'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멜로라는 장르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관계에 관심 있었으며, 멜로는 그 관계를 관객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물론 여기엔 곽지균 감독의 감수성과 멜로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도 무시하진 못한다). 그래서 그의 멜로엔 신파와 최루성 설정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삼각 혹은 사각으로 이루어진 '관계'들이다. 

[겨울 나그네] [상처] [청춘] [장미의 나날](1994)은 두 남자와 두 여자의 관계였다. [두 여자의 집]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였고, [깊은 슬픔]과 [이혼하지 않는 여자](1992)는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관계였다. [그후로도 오랫동안]이 한 여자와 세 남자의 관계라면, [젊은 날의 초상]은 한 남자와 세 여자의 관계였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그는 사랑, 우정, 질투, 좌절, 욕망, 미련 같은 다양함 감정과 심리를 탐구했다. 

서울 관객 19만2천 명을 동원했던 [그후로도 오랫동안](왼쪽 사진)과 서울 관객 17만5천 명을 동원했던 [젊은 날의 초상](오른쪽 사진). 데뷔 후 다섯 번째 영화까지, 그는 영화는 대중적 흥행성과 접점을 이루는 작품들이었다.
[겨울 나그네]부터 [젊은 날의 초상]까지, 곽지균 감독은 끝없는 자기 반성의 시간을 기진다. 그는 [겨울 나그네]가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두 여자의 집]에선 좀 더 심리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심리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니 드라마 전개에 있어서 문제가 생겼고 그 결과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상처]에선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영화의 스토리를 훨씬 더 깔끔해졌지만, 깊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특히 원작자인 김수현 작가는 감독에게 "한 템포 느리다"는 충고를 했고, 네 번째 영화 [그후로도 오랫동안]에선 좀 더 리듬감 있고 역동적인 면에 신경을 쓴다(하지만 동적인 장면의 연출에선 부족함을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특히 [그후로도 오랫동안]은 특기할 만한 영화다. 수미(강수연)은 남자친구 진우(정보석)가 보는 앞에서 불량배들에게 윤간을 당한다. 이후 유학을 떠난 그녀는 7년 만에 돌아오지만,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녀는 낮엔 학원 강사로 일하고, 밤엔 클럽을 전전하며 즐기는 이중 생활을 한다. 이때 그녀 앞엔 세 남자가 있다. 옛 연인이었던 진우, 그녀가 강의하는 학원의 수강생인 강호(김세준) 그리고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가 삶의 신념을 지니게 된 현욱(김영철). 여기서 곽지균 감독은 고통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사랑과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인데, 고통은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이며, 그러기에 그의 인물들은 방황하고 극단적인 경우엔 죽음을 선택한다. 

곽지균 감독이 스스로 세상과 이별한 지금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자살의 모티프는 종종 등장했다(그렇다고 이런 설정들이 감독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곽지균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대방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오는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그후로도 오랫동안]에서 진우가 수미에 대한 이기심과 집착으로 결국은 자살하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이것은 "사랑에서 상대에게 가지게 되는 이기주의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랑의 관계에서 그런 집착과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수미는 과거를 딛고 일어서며, 이때 현욱은 수미에게 "인생의 구원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왼쪽 사진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현장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영철, 정보석, 강수연, 김세준 그리고 곽지균 감독. 오른쪽 사진은 [젊은 날의 초상] 현장.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만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물었던 셈이다. 1993년에 영화월간지 <영화>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 번도 의도적이진 않았어요. 대부분 원작이 있는 것을 영화로 만드는데, 이상하게도 주인공들이 다 죽는 작품들이에요. (중략)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난 상당히 불교 철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요. 무상함에서 오는 니힐리즘이 아직 설익어서 그렇게 나타나고 있나 봐요." 특히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겪었던 느낌과 생각이 자신의 초기 영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는데, 특히 [두 여자의 집]과 [상처]에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련의 경험을 통해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초연한 자세는 영화에도 스며들었다. 

[젊은 날의 초상]은 그의 작가적 세계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여기서 감독은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문열의 자전적 소설의 배경을 1980년대로 바꾸고, 역시 이문열의 소설인 [그대 다시 고향에 못 가리]를 고향 집 에피소드로 결합한다. 주인공 영훈(정보석)은 [겨울 나그네]의 민우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감독 자신의 20대가 투영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이면서 일종의 청춘 영화이며, 감독은 청춘의 시기를 "이율배반의 시기이고 예민하고 섬세한 시기이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연령대라고 본다. 이 영화에서 영훈의 방황과 고뇌는 단순하지 않다. 그는 가난과 첫사랑의 상처와 계급적 갈등 속에서 고민한다. 어쩌면 그 고민은, 20대이기에 마땅히 지니는 그 무엇이며 감독은 자신의 분신이 영화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걸 조용히 지켜본다. 그리고 영훈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정님 누나(이혜숙)는 영훈에게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한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곽지균 감독은 "[겨울 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청춘]은 '통과의례 3부작' 같은 영화들"이라고 말했다. [겨울 나그네]로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젊음의 고뇌를 그렸고, [젊은 날의 초상]으로 본질적으로 방황기인 스무 살 전후의 시기를 보여주었다면, 미처 그리지 못했던 청춘의 코드인 '섹스'를 보여준 것이 [청춘]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청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인(김정현)이었지만 또한 자효(김래원)이기도 했다. 내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을 자효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혹의 나이에 만난 모색의 시기

1992년에 그는 [이혼하지 않은 여자](왼쪽 사진)를 연출했고, 장현수 감독의 [걸어서 하늘까지](오른쪽 사진)의 시나리오를 썼다.
1990년대 한국영화는 격렬한 변화를 겪는다. 대기업과 금융 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는 점점 트렌드와 컨셉트를 중시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까지 존재했던 충무로의 구체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맨틱 코미디와 조폭 액션 장르가 떠올랐고, 대중은 예전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즐기진 않았다. 이런 변화 속에서 곽지균 감독은 위기를 겪게 된다. 1992년의 [이혼하지 않는 여자]는 흥행에 실패했고, 미스터리 장르를 시도했던 [장미의 나날](1994)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다시 멜로로 돌아간 [깊은 슬픔](1997)의 흥행 참패는 그를 더욱 궁지로 내몰았다. 

곽지균 감독의 하강기가 1992년부터 시작된 건 조금은 의미심장하다. 1992년은 [결혼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충무로에 이른바 '기획영화'라는 것이 시작되었던 해. 그러면서 신인 감독이 대폭 등장해 신세대 관객들을 위한 영화를 내놓았고, 한국영화는 제작자와 관객 모두 급격한 변화를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1992년이었다. 

미스터리 장르에 도전했던 [장미의 나날](왼쪽 사진)과 다시 멜로로 돌아온 [깊은 슬픔](오른쪽 사진). 하지만 곽지균 감독의 모색은 시행착오에 부딪히며, 그는 힘든 1990년대를 지낸다.
1990년대 충무로에서, 198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은 '중견'이라는 이름을 달기도 전에 어정쩡한 위치에서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 1990년대에 데뷔한 감독들이 겪는 딜레마와 똑같은데, 곽지균 감독은 [키노 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에서 "할리우드와 유럽, 그리고 그 이외의 지역이 아닌 바로 이곳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나칠 정도로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감독이 성숙하고 변화할 시간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그래서는 영화가 삶의 반영이 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한 사람의 수명은 백 년도 안 되지만, 한 감독의 수명은 그것의 10퍼센트도 못 되다니…." 

이런 맥락에서 그가 [깊은 슬픔]을 만들면서 겪었던 일은 안타깝다. 당시에 대해 그는 2000년 즈음에 이렇게 회상했다. "[깊은 슬픔]을 만들 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정통 멜로드라마로 만들려고 했지만 (투자사와 제작사에서) 무리하게 액션을 요구하는 바람에 영화 자체가 이상해졌다.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중견 감독들이 힘든 시기를 겪었다." 

[청춘]의 한 장면(왼쪽 사진)과 현장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곽지균 감독(오른쪽 사진). 그의 야심찬 시도는 생각만큼 좋은 반응을 얻진 못했다.
신경숙 원작에 곽지균 감독이라는 조합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깊은 슬픔]이 서울 관객 1만 명을 겨우 넘기는 성적으로 마감된 후, 그는 3년의 공백을 딛고 [청춘]을 내놓았다. 곽지균 감독은 이 영화를 "개인적으로 피해가고 싶은 영화인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라고 표현했다. 청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데 있어 '섹스'라는 부분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나이 30대 초에 [겨울 나그네]를 만들어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젊음의 고뇌를 그렸다면 4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오히려 그 자체로의 '청춘'을 마주볼 수 있을 것 같다. [청춘]은 청춘의 문 앞에 서 있는 2000년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청춘 예찬'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다시 20대로 돌아간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치열했던 시기로의 회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초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청춘 그 자체'를 맞닥트린다. [겨울 나그네]와 [젊은 날의 초상]이 우회적이었다면, [청춘]은 매우 직접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섹스와 욕망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울 관객 10만 명이 조금 안 되는 흥행도 조금 아쉬웠지만, [청춘]에 대한 가장 아쉬운 건 평단의 반응이었다. 적지 않은 평론가들이 [청춘]을 두고, 한 중견 감독이 재기를 위해 섹스를 이용한다고 평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곽지균 감독은 다음 영화이자 이제 유작이 된 [사랑하니까, 괜찮아]까지 6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시도들이 있었다. 2002년엔 설원에서 펼쳐지는 발레리나와 스키 선수 사이의 판타지 멜로인 [하나에]가 있었고, 2003년엔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을 겪은 주인공이 시간이 흐른 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의 [보해]라는 영화가 있었다. 김래원의 캐스팅도 결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두 프로젝트는 모두 무산되었고, [사랑하니까, 괜찮아]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사라졌다. 

그의 유작이 된 [사랑하니까, 괜찮아](왼쪽 사진). 이 영화의 시사회는 곽지균 감독의 마지막 '공식적 자리'가 되고 말았다.
"열 작품 정도는 해야 자기 자신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곤 했던 곽지균 감독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열 번째 영화인 [사랑하니까, 괜찮아]를 남기고 관객과 영영 이별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인생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영화를 위해 산다는 생각은 생각은 없고, 다만 사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왜 당신의 남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섬약한 남자들이냐"는 질문엔 "제가 약한 남자이기 때문은 아닐까요?"라며 멋쩍게 웃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능력이나 흥행적 감각 같은 부분은 여러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최소한 그는 정직하게 살고 그 삶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며, 그 안에서 자신의 고민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답게'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1986년부터 2006년까지, 그가 활동한 20년은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격동기였다. 그는 에로티시즘이 판 치던 시기에 데뷔해, 사회파 리얼리즘 영화와 기획영화 컨셉트의 로맨틱 코미디와 블록버스터 대작과 액션 스펙터클 영화로 트렌드가 바뀌는 와중에, 조용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길을 멈추었다. 

[키노 감독사전]의 앙케이트엔 "당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다면?"이라는 질문이 있다. 여기에 곽지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영화로부터 자연으로 돌아가다." 하지만 이 말은 그의 유언이 되지 못했고, 그는 "일이 없어서 괴롭고 힘들다"라는 말을 남겼다. 부디 그 괴로움을 벗어두고, 편안히 자연으로 돌아가시길. 다시 한 번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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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숭이 | 2010/05/28 04:47 | 비공개_공부 | 트랙백(3001)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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